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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014년 8월/모스크바

러시아여행-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빅토르 최, 푸쉬킨

by 군자삼락 2014.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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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자의 천국이라 불리는 모스크바 문화 예술의 장소 아르바트거리

한국의 대학로와 비슷한 느낌인데 빅토르 최의 추모벽과 푸쉬킨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거리였습니다.

 

빅토르 최(Viktor Tsoi) 추모의 벽

한국계 러시아인으로, 소련이 해체되던 무렵 러시아의 영웅으로 불렸던 빅토르 최는 1962년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에서 한인 2세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 러시아인'입니다. 그런데 미술학교에 다니던 시절, 교내에서 팔라타 세스토이​라는 록 그룹을 결성해 활동하다가, 반국가적인 노래를 연주한다는 이유로 퇴교당하고, 그 뒤 기술학교에 다시 입학해 목각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지만, 빅토르 최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1982년 키노​(KINO)라는 역사적인 록 그룹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발표한 <혈액형>이라는 노래는 곧 수많은 러시아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습니다. 러시아에서 빅토르 최와 '키노'의 인기는 실로 폭발적인 것이었지만, 빅토르 최의 노래 중에는 유독 자유와 저항을 외치는 가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빅토르 최 50주년 생일날(2012.6.21) 추모벽 앞 추모공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BOy80MJinE8

 

 

 

이후 빅토르 최의 인기와 젊은이들의 저항 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사건은 1990년 6월 24일, 모스크바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키노의 공연에서 벌어졌습니다. 무려 1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빅토르 최와 키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관중들은 빅토르 최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변화와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경기장 주변 경찰 병력도 누를 수 없을 정도로 컸고, 곧 대규모 시위로 번지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빅토르 최는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인 KGB가 감시하는 최고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는데 1990년 8월 15일, 빅토르 최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여덟 살이었습니다.

 

빅토르 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소련의 젊은이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소련 전역에서 다섯 명의 여성이 그를 그리워하다 자살했으며, 수많은 이들이 빅토르 최의 시신이 안치된 시립병원에 몰려들었습니다. 병원은 곧 빅토르 최의 추모 인파와 팬들이 던진 장미꽃으로 뒤덮였고, 그의 죽음에 흥분한 팬들의 성화로 장례식이 며칠씩 연기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

 

 

소련 곳곳에는 빅토르 최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카잔, 키예프, 알마아타, 타슈겐트 등에 빅토르 최 거리가 들어섰고,

이곳 모스크바의 문화예술의 장소인 아르바트 거리에도 '빅토르 최 추모의 벽'이 생겼습니다.

 

유튜브 빅토르 최 관련 영상들 입니다.

빅토르최 КИНО - Перемен Peremen

https://www.youtube.com/watch?v=_i5zbzYMkhc

 

빅토르최 KINO - Voina (Live)

https://www.youtube.com/watch?v=Q2XvcniqoZg

 

빅토르 최 올림픽경기장 공연

https://www.youtube.com/watch?v=YAixwxt0dVs

 

 

 

 

 

푸쉬킨이 결혼 후 몇 달간 신혼을 보냈던 집,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내부 구경을 위해서는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합니다.

 

 푸쉬킨은 소설 대위의 딸,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등의 시를 남긴

천재적인 작가이면서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에 무모한 결투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인물입니다. 

푸쉬킨은 매력적인 미모의 나타시아 곤차로바와 사랑에 빠져 청혼하였으나 나타시아 집안의 반대로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집을 마련하고 정착했는데 이 시기에 ‘대위의 딸’과 ‘스페이드 여왕’을 집필하였다고 합니다.

  

 결혼은 아름답고 순수한 것 같았으나 둘 사이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고, 특히 나탈리아는 지적, 시적인 관심이 없었으며, 자신의 미모를 뽐내기를 좋아했던 나탈리아는 황제 표트르와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고, 러시아 사교계에서 염문을 뿌리고 다니며, 허영에 빠져 푸쉬킨의 명예와 자존심을 무너뜨렸는데, 러시아의 기병대에 근무하던 프랑스 장교 단테스와 염문이 사교계에 일파만파로 퍼지게 되었고, 이에 분개한 푸쉬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1837년 1월 27일 푸쉬킨과 단테스는 나탈리아를 두고 결투를 하게 됩니다. 근위대 장교인 단테스와의 결투는 당연히 푸쉬킨이 불리한 결투였음에도 자신의 자존심과 사랑을 걸고 한 것이었는데, 이 결투에서 푸쉬킨은 결국 복부에 입은 총상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7세였는데, 그가 유언처럼 남긴 시가 바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입니다. 푸쉬킨은 시대의 아픔과 국민의 상처를 아파하면서도, 사랑을 위하여서는 모든 것을 건 비운의 삶을 살다간 천재작가였습니다.

 

푸쉬킨과 그의 아내 나탈리아 동상

푸쉬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9년에 세워진 동상으로 부부의 동상이 손을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손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사랑의 아픔을 동상에 표현 듯합니다.  푸쉬킨이 죽어 가면서 유언처럼 남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그가 얼마나 상심하며 떠나가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기원했는지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아르바트 거리 풍경

 

 

 

 

 

 

 

가이드가 무료로 화장실은 공립학교, 유료 화장실은 사립학교로 부르겠다고 사전교육이 있었는데, 맥도날드는 공립학교입니다...^^

 

크레믈린 궁으로 가면서 버스에서 본 모스크바 거리 풍경입니다.

 

 

우주센터인 듯합니다.

 

레닌 동상

 

 

 

 

 

크레믈린 궁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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