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연길 → 백두산
연길은 한국의 지방 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리의 광고판은 모두 한글로 표기되어 있고 아래에 한자가 적혀 있다. 로타리의 백두산 호랑이 상이 인상적이었다. 연길시는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주도로서 중국 내 조선족 문화의 중심지이다.
한국어 방송국과 신문사가 있으며 의과대학과 연변대학 등이 있다. 연길에서 버스로 백두산으로 향했다. 4시간이 넘는 버스 여행 중 가이드로부터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다.
도로변의 풍경은 우리나라 70년대 정도와 비슷하였다. 가옥 형태를 보면 조선족인지 중국한족인지 금방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밋밋한 삼각지붕은 중국 한족 가옥, 학이 날개를 편 듯한 운치 있는 학각 지붕은 조선족의 집이며 결정적으로 조선족의 집은 다 쓰러져 갈 듯한 허름한 집도 벽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금방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조선족은 부지런하고 교육수준이 높아 문화수준이 제일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중국 한족에 비해 소비성향이 높아 경제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편이라고 한다. 휴대폰도 많이 보급되어 있는데 신문광고에 나오는 가격을 보면 삼성 휴대폰은 거의 최고가격으로 표시되어 있고 서울에서의 가격과 별 차이가 없었다. 중국의 경제 가치로 볼 때 가난한 집에서 수백만원짜리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셈이다.
연길 조선족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처녀들이 한국이나 중국 대도시로 빠져나가 노총각이 많으며 가이드의 말을 그대로 표현하면 “저녁에 술 쳐먹고 개지랄 하는 사람은 거의 장가 못간 조선족 노총각입니다.” “조선족인구가 계속 줄어 안타깝습니다...” 나도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달리다 길가 휴게소에 들렸다.
휴게소라야 조그마한 시멘트 건물에 천막을 치고 농산물들을 팔고 있었다.
인심이 후한 건지 꿀이 싼 건지 백두산 꿀이라며 비닐컵에 반이나 되게 꿀을 담아 맛보라며 주었다. 건물 뒤에 있는 천막으로 둘러쳐진 간이 화장실에 들렀더니 나무판자 몇 개 걸쳐놓고 칸막이도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위에 꿀벌 몇 마리가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저 벌이 꿀통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우웩... 퉤퉤퉤...
드디어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다. 장백산이라고 적혀있는 관문을 지나 한참 더 들어가니 천지라 쓰인 관문이 보인다.
수많은 무리의 여행객들이 짚차를 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정상에 갔다 온 차에서는 계속 사람들을 내려놓고 다시 사람들을 태우고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벌통에 드나드는 꿀벌 모습이었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내일은 기상이 더 안 좋을 것이라는 가이드의 얘길 듣고 우리 일행은 두 대의 차에 분승해 백두산을 올랐다. 차는 여러 해 전에 파리- 다카르 랠리에서 우승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갤로퍼와 비슷한 “파제로”였다. 급커브길이 많은 오르막 산길에서 몽고족 생김새의 기사는 수시로 추월을 일삼아 일행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였다. 좌우에 늘어선 빽빽한 원시림의 키가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덧 개활지가 나타나고 정상인 듯한 능선이 보였다. 차에서 내려 모래가 된 화산 분출물로 쌓인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했다.
비바람과 짙은 안개 때문에 발아래 있다는 천지가 보이지 않는다. 10여분을 기다렸지만 천지는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비를 입은 채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아쉬움을 남기고 하산했다
가이드가 위로의 농담을 건넨다. “중국을 왜 차이나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한국과 수준 차이가 나서 입니다.” “왜 천지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천지 못 보는 사람이 천지여서 그렇답니다...”
백두산을 내려와 장백폭포로 향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웅장한 장백폭포의 모습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노천 온천에 삶은 계란을 팔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노른자는 익었는데 흰자는 반숙이었다. 가이드가 신비한 일이라며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른단다. 온천물의 온도가 흰자가 익을 온도가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더니 이제서야 궁금증이 풀렸다며 선생님은 역시 다르다며 추켜세운다. ..^^
숙소였던 백두산 호텔, 사장님이 재일 동포였는데 중국정부에서 관광지구 정리 구실로 호텔을 비우라고 하여 문을 닫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하소연 하였다. 투숙객이 그리 많지 않았고 저녁에 호텔 바에서 마셨던 생맥주 맛은 잊을 수가 없는데 우리 일행 10여명이 호텔바의 생맥주를 동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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