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5개 탐방코스 중, 가장 무난한 제1코스, 3월 17(토) 오전 산행기입니다.
아침에 하늘이 맑게 보여서, 남한산성 서문 전망대에 가면 산뜻한 서울전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갑자기 산행을 결정하였습니다. 정오가 다 되어서 서문에 도착하니 그 사이에 미세먼지 농도가 증가하였는지 남산타워가 흐릿하게 보였던 아쉬운 산행이었습니다.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 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란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 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 당하지 않고 47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내문요약
제1코스 탐방로는 3.8km 거리에 약 80분이 소요되는데, 중앙주차장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시 주차장가지 돌아오는 거리 약 5km, 중간에 휴식시간까지 포함하니 3시간 가까이 걸린 산행이었습니다.
산성 내 모든 공영 주차장 주차료는 종일 1천원(선납)으로 주차비는 부담이 없는데, 주말이라서 모두 만차, 남문주차장과 로터리주차장을 지나 남한산성 천주교 순교성지 옆 중앙주차장으로 갔는데 이곳도 주차장 입구에 대기하고 있다가 출차 하는 차를 기다려 입차 할 수 있었습니다.
북문(전승문,全勝門):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3년(1779) 성문을 개축하고 전승문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안내문요약
북문(전승문)에서부터 산성을 따라 반 시계방향으로 산행을 시작합니다.
북장대 터: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북장대가 있었던 곳으로 인조 2년(1624)단층 누각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중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18세기 초 붕괴되었으나 한봉성과 연주봉 옹성의 축성으로 실효성이 없어져 수축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안내문요약
하남시 춘궁동, 고골방향인 듯합니다.
연주봉 옹성: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인데, 남한산성 옹벽은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연주봉 옹성은 서북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되었습니다.
서문 근처 가장 높은 곳의 성벽은 서울 잠실과 남산이 보이는 야경촬영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등산객을 위한 서문 밖 전망대와 함께 123층 555m, 롯데타워가 보입니다.
흐릿하지만 롯데타워 뒤쪽으로 청담대교와 영동대교가 겹쳐 보이고 성수대교와 남산N타워도 보입니다.
서문(우익문, 右翼門): 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개구부는 내외면이 반원형의 홍예식이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판문을 설치하였다.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 개축하여 우익문이라 칭하였다.-안내문요약
서문 밖입니다
잠실에서 3315 시내버스를 타고 마천동 남한산성입구 정류장에 도착(35분소요) 서문으로 올라가는 등산 코스가 있는데, 20여 년 전 성당 레지오팀을 따라 서문코스를 처음 등산하면서 뒷동산 올라가는 정도일 것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갔다가 급경사를 헉헉거리며 오르다가 두 번이나 쉬고서야 올라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참고로 서문의 해발고도는 약 450m입니다.
☞그렇지만 산성내의 주차장에서 포장도로(일반차량 통행금지)를 이용하면 유모차도 어렵지 않게 서문까지 올라가 서울 잠실방향 전경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서문 밖 전망대
서문 밖 전망대에서 본 서울 잠실방향 전경
봄소식입니다.^^
수어장대 진입로
수어장대 입구의 청량당(淸凉堂): 이회장군과 부인의 사당
이회는 조선시대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동남쪽 부분을 맡았는데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는 억울한 모함을 받아 처형당한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을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는데 그 후 그가 맡았던 곳의 공사가 튼튼하게 잘되었고 무고함이 밝혀져 사당을 지어 넋을 달래게 하였다.-안내판 요약
1960년대 청량당에서 굿을 하는 광경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유형문화재 1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와 무망루(우측)
무망루(無忘樓):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으로 편액이 수어장대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 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안내문요약
남한산성역 방향에서 산성 안으로 들어오는 터널 방향 길이 내려다보입니다.
남한산성 남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 남문으로 내려가는 길 경사가 제법 가파릅니다.
남문(南門, 지화문 至和門): 남문은 정문에 해당되는 성문으로 남한산성 4개의 문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이 문은 정조 3년(1779)에 기존의 성문 자리에 새로이 문루를 마련하면서 성문 이름을 지화문(至和門)이라 명명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안내문요약
미세먼지로 서울시내 전망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봄기운을 느끼며 가볍게 산행한 남한산성 탐방로 제1코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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