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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2012년 8월

폴란드여행- 아우슈비츠 수용소, 심약한분 클릭금지 오시비엥침 Oświęcim

by 군자삼락 2016. 3. 8.

아우슈비츠(폴란드어: Oświęcim 오시비엥침, 독일어: Auschwitz 아우슈비츠)

마음이 착잡해지는 여행지입니다. 심약한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 블로그를 나가 주시길 권장합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히틀러의 나치시절 대규모 유대인 강제 수용소이며 노역과 집단학살의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다른 곳에 있는 제2, 3 수용소와는 달리 독일군들이 황급히 퇴각하면서 미처 시설과 증거물들을 파괴하지 못해 당시의 상황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수용소를 둘러보며 인간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에 할 말을 잃었고, 1970년 빌리브란트 서독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하여 비 내리는 날 우산도 쓰지 않고 유대인 위령탑 아래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할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는 글귀가 보이는 수용소 정문입니다


주차장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하여 헌화 및 묵념하는 유명 인사들의 사진입니다. 전 현직 교황님을 비롯하여 달라이 라마 등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하루 노역이 끝난 후 수많은 유대인들이 출입문을 통과할 때면, 지친 수용인들을 빨리 통과시키기 위해서 행진곡을 연주 했다고 합니다.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 지역이 지리적으로 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을 철도를 이용하여 실어 날라 모으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였다고 합니다.


나치 지배하에 있었던 1940~1945년 동안 130만 명이 아우슈비츠로 왔고 그중 11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데, 유대인 사이트에는 희생자 수를 200~400만 명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모래시계 같은 곳에 화장한 재가 담겨 있는 위령비


영화 속 장면이 아니고 실제 상황 사진입니다. 독일군 친위대 장교의 앨범이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가 강제 수용소인 줄도 모르고 속아서 유대인끼리 모여 일하며 살게 되는 줄 알고 귀금속과 생활용품들을 챙겨 수용소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Before The selection

기차에서 내리면 우선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여 세운 후 의사들이 노동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감별하여 노동력이 없는 노약자와 어린이는 즉시 가스실로 보내졌다고 하는 데, 어린이라도 쌍둥이는 생체 실험을 위해 우선 살려두었다고 합니다.


뒤쪽에 잠시 후면 소지품을 맡긴 뒤 가스실로 향할 운명인 줄도 모르고 웃는 모습도 보입니다아이들이 엄마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버티자, 독일군이 본보기로 작은 꼬마 아이의 팔을 부러뜨렸는데, 이를 본 엄마들이 놀라서 스스로 아이를 떼어 놓았다고 합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 독일군의 손짓에 의해 분류되고 있는 유대인 남자들


ON THE WAY TO DEATH

단체 생활을 하려면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설명으로 샤워실(가스실)로 향하게 했는데, 의심을 피하기 위해 손에 비누를 들려서 가스실로 들어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After selection' 선별 후...


유대인이 몰래 촬영한 필름에서 발견된 사진이라는데, 여성들이 옷이 벗겨진 채로 가스실로 향하는 모습인 듯합니다.


독가스로 살해된 시체를 태우는 소각로가 부족하여, 야외에서 시체를 태우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독가스 발생용 화학약품, 깡통 1개 분량으로 400명을 사망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용된 독가스 통들... 백만명이 넘는 많은 유태인들이 가스실에서 희생되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린 유대인들이 가져온 짐들, 부유한 유대인들이 많아서 귀중품도 많았는데 나치의 군비에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희생된 유대인들의 안경테, 모두 안경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었을지 상상이 됩니다.


유대인들의 머리카락을 섞어서 만든 천이라고 합니다.

머리카락으로 카펫을 만들기도 하였다는데, 퇴각 당시 제1 수용소 창고에서만 7톤의 여성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노동력이 없다는 이유로 1순위로 희생된 장애인들의 유품들 


가방을 잘 보관해 준다는 말을 듣고 나중에 찾을 수 있을 줄 알고 가방에 이름을 써서 맡겼지만 그들은 가방을 다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스실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신발이 엄청난 양입니다. 신발에 귀중품을 감췄을 수도 있어서 따로 모아 놓았다고 합니다.


평소 사용하던 면도용 솔을 가지고 온 것을 보면, 유대인들끼리 잘 살게 해준다는 말을 믿고 왔다는 말이 맞는 듯합니다.


노동력이 있어 우선은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사진입니다.


사진에 꽃이 있는 경우는 전쟁이 끝난 후에 가족을 찾은 사람들 사진이라고 합니다.


수용소 숙소사진입니다.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공동화장실.




희생자들이 샤워장으로 알고 들어갔던 가스실 입구


가스실 내부, 공동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벽에는 가짜 샤워기가 달려 있어서 희생자들이 모두 입장할 때까지 속일 수 있었는데, 모두 입장하면 물 대신 천장에서 독가스 발생 화학약품이 투입 되었습니다. 벽에는 긁힌 자국들도 있었는데, 독가스에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손톱자국이라고 합니다.


시체 소각로와 시체를 밀어 넣던 기계

증언자들에 의하면 소각 효과를 증대시키기 위해서 시체에서 흘러 바닥에 고인 기름을 다시 시체에 끼얹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헤스" 의 처형을 위해 만든 교수대라고 합니다.


동유럽 여행으로 활기에 넘쳤던 일행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나치의 실상을 확인한 후 할 말을 잃은 모습들입니다.

지붕만 보이는 곳이 가스실과 시체 소각로가 있는 건물인데 가스실의 비명소리가 수용소에 들리지 않도록 이곳에 시동을 켠 오토바이들을 세워두었다고 합니다.


시커먼 건물이 시체 소각로가 있는 곳입니다.


이중 철조망, 고통을 견디기 힘든 수용인 중에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스스로 뛰어들어 자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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